성과 씨는 무엇이 왜 다른가?
⊙ 원래 성은 모계를 표시, 씨는 부계를 표시, 첫 번째 성은 모두 ‘여’ 부수 사용⊙주방과 로마 성씨제도 유사하며 성은 로마의 ‘Gens’, 씨는 ‘Familia’에 해당⊙중국사서가 최초 기록한 법흥왕은 모씨로 되어 있으며 진흥왕 순수비에도 신하의 성이 보이지 않고 ⊙고려 이후에는 서역·동남아 출신 귀화자가 많다…장승룡·인후 등은 승상 대열에 합류하기도 한다.
저 | 김정현 역사저술가 월간조선 10월호
황제 탄생의 모습 황제의 어머니가 청수에서 황제를 낳으면서 공주라는 성이 생겼다.
국립 국어원 『 표준 국어 대 사전 』에 따르면”성씨”을 “성을 높이고 하는 말”라고 해설하고 있다. 예를 들어 김 씨 이 씨의 말에서 김(돈)이(이 씨 성에 존칭으로 그를 붙인 것이 “성씨”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래 중국 주대의 때에는 시게 우지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중국에서는 성의 기원을 바퀴비에 두고 있었다. 바퀴에서 혈통 표시로 일찍이 등장한 것이 성이었다. 당시 주로 왕실의 성은 공주 성이었다. 1955년에 조사 히로시 동국대 교수가 발행한 『 동양사 대관 』은 저우비의 성씨 제도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여성에 대한 존칭”공주”는 원래 스오의 왕실의 성
신농씨의 성씨인 강(姜)은 그의 어머니가 강수가에서 신농씨를 낳은 데서 비롯되었다.〈州の姓氏制度はローマの姓氏制度と類似した点が多い。 周の人の姓はローマの「Gens」に該当したものだが、色々な姓の中で州王室に属する稀姓が最も高貴で有力だった。 姓を複数の氏に分けたが、氏は主に居住する地名または世襲する官名を取って付けた。 氏はローマの「Familia」に当たるのだ。 したがって、当時貴族の称号は姓·氏·名の3つの部分になっており、普通男性は氏と名前を称し、女性は姓と名前を称した。 例えば、陳の公室姓は奎であり、氏は陳だった。 かつて秦のある孔子が空室を簒奪したことがあるが、春秋には彼を陳陀と記録していた。 ジンウン氏で、タは名前だが、彼が男であるため、ソン·インギュを省略したのだ。 そして、鎮から衛国に出家した女性がいたが、呂奎、載奎と言った。 彼らは女性なので姓を奎と言った。 これはローマでも同じもので名前(persona)、姓(Gens)、氏(Famillia)を表示したものだが、男性は普通姓を省略した。 主王室の姓は熙の姓だが、女性を全て熙と呼んだため、後に熙が一般女性の尊称となった。 周人の姓は結婚において重要な意義を持つもので、それは同性間結婚を禁ずるものだった。 後世になって氏族制度が乱れて姓が事実上消滅し、氏と姓を混用した後も同性不婚の法が実際に同氏不就となり今日に至るまで続いてきた。 例えばチャン氏とチャン氏、イ氏とイ氏はいくら血縁が遠くても互いに結婚することを避けることだった。〉 周の王室姓が熙だと言ったが、王室から諸侯に、すなわち封建国家の君主に出れば同族で希の姓を持ったとしても氏を新しく持つのが州の姓制度だった。 この制度は州の宗法から始まったものだった。 州の宗法には大宗と小宗があった。 大宗は宗家のようなもので、最初の始祖を永久に祀るものだった。 昭宗は分家した系譜を言った。 諸侯国の君主として封を受けて召使になった最初の人を始封者と言った。 奉公者は新しい城を持った。 それを「氏」と言ったが、李氏を持って再び血統を表示したのだ。 小宗の侍封者の子孫はこの「氏」を続けた。 その後、彼らの子孫からも「氏」を作ったりもした。 これが種の噴出だ。 ここで多くの種類の「種」が登場する。 周の時代に初めて現れた姓は皆が「女」を部首(字辺に付いたもの)として使用した。 周の王室の城といわれる熙をはじめ、姜、奎、斯、遼、吉などだった。 「喜」は皇帝の母親が熙水というところで子供を産んだことから始まった。 「川」は神農氏の母親が江水で子供を産んだので「川」を姓とした。 「遼」は于舜の母親が遼河に住んでいたため、これを姓としたものだ。 皇帝、シンノン氏、ウスンはすべて中国の歴史が神話的人物として描写する先祖たちだ。 これら神話の人物はみな男性だった。 皇帝は中国文明発祥の地である黄河地域を初めて治めた帝王という意味だ。 皇帝の名は憲元だった。 皇帝、シンノン氏、ウスンといった神話の人物の姓はすべて母親から始まった。 姓はもともと母系を表示するものだったという話だ。 反面、諸侯国の血統を表示する「氏」は父系を表示するものだ。 諸侯国の君主が全員男性だったからだ。 「李」氏の由来中国古代姓氏の由来を明らかにする本がある。 5世紀に出た『魏書』『官氏志』、12世紀に出た『通志』がそれだ。 南宋の時に刊行した『通知』氏族志に現れた李氏の由来を見ると、次のようだ。 〈中国商の時、理征という高官がある事件で暴君周王に殺された。 その時、彼の妻が一人しかいない息子の利正を連れて他国に逃げた。 その帽子は逃げながら木の下で空腹の体をしばらく休んだ。 この木は大柳だった。 帽子は落ちた大柳の実でお腹を満たした。 おかげで母子は空腹を免れた後、無事に他国に行き、そこで息子は成長した。 その後、孫まで持ち、その孫は陳の大夫の官職にまで就いた。 孫は祖父の命を救ってくれたオヤナギが忘れられないと言って、オヤナギの李を苗字にした。〉 上記で紹介した姓氏の淵源を紹介した本を見ると、姓氏の中には国名、地名、官職名などで氏の字、すなわち姓氏になったものが多かった。 チョン(鄭)、チョ(趙)、ハン(韓)、オ(呉)、シン(申)、曹,丁(丁)、ソン(成)、ソ(徐)、ファン(黄)、魯,宋,朱,陣,梁などが国の名前から取った姓氏だ。 白、培、盧、方、蘇、辛、楊、高、劉、元などは食邑(国で功臣に与えた地域)から取った姓氏だ。 姜、河、林、柳、地、千などは地名と関連した姓氏だ。 官職名、すなわち官職から取った姓は張、尹、崔、洪、車、秋、史などだ。 字と諡号から由来した姓氏もあるが、これは先祖の字や諡号から一文字を取って姓氏にしたものだ。 ソン(孫)、ムン(文)、ミン(閔)、ナム(南)、孔(孔)、ユ(劉)、田などがこれに該当する。 新羅は単姓、高句麗·百済は複姓韓国人の苗字起源は高麗時代の金富植が書いた『三国史記』から分かる。 もちろん各姓氏の門中が系図を持ってはいるが、事実と認定しにくい部分が少なくない。 反面、『三国史記』は新羅の苗字登場に詳しい説明があり、百済と高句麗の苗字についてもある程度言及している。 新羅は『三国史記』の記録でよく知られた6親等の姓があった。 彼らの姓氏はチェ(崔)、チョン(鄭)、イ(李)、ソン(孫)、ベ(薛)、ソルだ。 そして王族の姓としてパク、ソク、キムがある。 現在の韓国人の姓の中には新羅に登場した姓が人口数で主流を成している。 『三国史記』に現れる高句麗や百済系の苗字は、今日ではほとんど見当たらない。 高氏姓であれば、私たちの歴史からまず高句麗の建国始祖高朱蒙を思い浮かべる。 しかし、今日の韓国の高氏は高句麗高氏ではなく耽羅(済州島)に起源を置いている。 最近になって遅れて高句麗高氏に起源を置くと主張する高氏がいるが、宝学系では記録が裏付けられていないとして認めない。 興味深いのは『三国史記』が言及した苗字は大体一文字の単姓であるのに比べ、百済と高句麗人の名字は大体二文字で構成された複姓という点だ。 新羅は中国唐の姓氏制度に影響を受け、主に丹城を使用した。 唐は世族の姓がほとんど単姓だった。 新羅の姓氏起源で一般的に知っている朴赫居世をはじめ、3代儒理王の時に6村から登場したという姓氏たちに疑問を提起する説もある。 このような主張は、中国の史書に対する検討から始まった。 新羅は23代法興王(514~540)以前の王の場合には諡号と苗字もなかったという。 中国の『梁書』と『南史』は新羅の場合、法興王の時になって初めて苗字を持ったと記録している。 これによると、法興王は苗字を慕、名前は秦と記録した。 『北斉書』は法興王に次ぐ真興王(540~576)を金真興と記録した。 新羅の王を金氏としたのはこれが最初の記録である。 中国歴史書には法興王以前の新羅王の諡号と姓に関する記録は見当たらない。 中国史書によると、新羅には文字がなかったという。 文字がなかったら、義堂氏もいなかったと見なければならない。 法興王や真興王という諡号は中国から伝来し、法興王の時から初めて使用されたもので、『三国史記』でも記録されている。 法興王以前の王たちは尼師今、麻立干という呼称を使用した。 法興王以後、漢字姓氏を使用したように「新羅が漢字姓氏を持つようになったのは法興王以後」という主張の根拠の一つは真興王純粋碑だ。 真興王は新しく征服した地域に純水碑を建てたが、ここに記録した臣下の名前を見れば姓氏が出ていない。 例えば慶尚南道昌寧で発見された真興王純水碑を見てみよう。 <喙(ペ) 居七智(ゴチルジ) 一尺干(イルチョクガン) 沙喙(サペ) 心表夫智(シムピョブジ)、及尺干(急尺ガン)、村主(村主)、麻叱智(マジルジ) 述簡>という内容がある。 フェはイ氏の姓を下賜されたという六部の梁部を、サフェはチェ氏の姓を下賜されたという沙梁部をいう。 村主は碑を建てた地域の村長をいうが、彼の名前が麻枝智であることだ。 一尺簡、及尺簡は中央官吏の官職名であり、述簡は地方官吏の官職名だ。 ゴルブジ、シムピョブジ、マジルジは新羅末の発音で表記された臣下の漢文文字の名前だ。 したがって、この碑は養父の一尺間の居居居跡、思良府の急尺間の心標敷地、村主スルガンマッジの3人を功臣として記録している。 真興王の臣下なら新羅6部、すなわち6村の人々の末裔である可能性も高い。 にもかかわらず、彼らに苗字がないというのはおかしい。 結局、真興王時代までも新羅に苗字がなかったと見るのが正しいだろう。 25代真智王(576~579)と26代真平王(579~632)の時に建てた碑にも臣下の名前だけがあり、苗字に関する記録は見当たらない。 これを見ると、新羅が朴赫居世をはじめ、ガラス王の時に6親等の姓氏베트남 리 왕조를 창건한 리태조 동상. 제공=박승교신라 6마을의 이름을 중국인의 성씨와 비교하면 배씨 성 하나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주류라는 백가 성에 들어갔다. 중국의 성씨 관련 자료에 따르면 박 성씨만은 한반도에서 등장한 성씨로 기록하고 있다. 『 중국 성씨 대전 』의 기록을 보면 고려에서 바탕으로 귀화한 환관 박·불 하나가 중국 박 씨의 조상이다. 그 후에는 “조선족이 이 성을 많이 갖고 있다(조선족 다 다음 성)”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달러는 분명치 않다 내용으로 고대의 토모에군에 있던 소수 민족의 수령인 박호에서 비롯된 성”이란 기록도 있다. 오늘 각 성씨 문중에서 발행한 계보를 보면 『 삼국 사기 』에 없는 성씨가 신라에서 시작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강(강)남(남), 노(노), 라(나)문(문), 밴, 변, 베크(흰색), 부산(남편), 사공, 서울(서재응)송(성), 소, 송(송)신, 신, 앤, 요, 오(로), 위, 유·유·육모·윤·임·장·장·존과 조·조. 그것이 사실이라면”그들 중에서 신라의 역사에 기록될 정도의 유명 인물은 왜 없었나”라고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들 성씨의 족보 기록을 보면 대부분 귀화인, 그것도 중국에서 온 귀화인인 경우가 많다. 고려 시대로 접어들 것으로 귀화자에 대한 기록이 역사 책에 많이 나타난다. 건국 당초는 외래인, 특히 여진족, 거란족 출신의 귀화자가 많았다. 한족계, 몽골족계도 많았다. 고려 후기에 들어온다고 귀화자의 출신지가 더 다양하게 되지만, 그 중에는 이슬람교를 믿는 토오크 또는 위구르인도 많았다. 고려 25대 고려 충렬왕(1247~1308)조에 귀화한 고위 관리 장·승료은이 바로 그들 중 한 명이다. 『 고려사 』는 그를 회회인으로 기록했다. 그는 원인으로 벼슬을 하고 있었지만, 원래의 제국 대학 장공주를 수행하고 고려에 와서 귀화했다. 장·승료은은 처음에 있을 때 이름이 세 가이었다. 그는 고려에 와서 랑장(정 6품)관직에서 시작, 대열의 첨의 참리(종 2품)관직까지 올랐다. 그가 바로 덕수 장 씨의 시조이다. 장·승료은과 함께 제국 공주를 수행하고 온 몽골인도 있었다. 그는 인 코오에서 모토 이치의 이름은 “저봐,”이었다. 그도 무관의 벼슬인 중랑 장(정 다섯개)를 받게 됐지만 고려 충렬왕이 이름을 바꾸겠다고 말했다. 그는 대장군의 기장 마사히데에게 “내가 당신과 친하니까, 당신의 성을 빌려서 쓰라는 “고 요청했다. 리자 오린 후는 검교 정승이라는 최고 관직의 자리와 함께 공신 칭호까지 받았다. 설기현이라는 이름의 귀화인도 있었다. 그는 위구르인이다. 바탕으로 귀화한지 백 료손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학식과 문장이 뛰어나고 원나라정에서 관직을 얻어 원래 왕세자를 가르치기도 했다. 공민왕과 즉위 전부터 알던 그는 공민왕에게 따라온 고려인이 됐다. 그의 출생지인 ” 설 렌”의 머리 글자를 따서 눈이라는 성을 땄다. 그의 아들 솔 장르는 이·성게 아래에서 활약하고 조선의 개국 공신이 됐다. 동남 아시아 출신의 귀화인들베트남 박닌성 딩방(이씨 왕조 발상지)에서 매년 음력 3월 15일 이태조의 창업을 기리며 열리는 천동축제. 화산이씨 시조 이용상은 태조의 8대손이다. 제공=박승교(《화산군 이용상》저자)동남 아시아 출신으로 화산 이 씨의 선조가 된 귀화인으로는 베트남 출신의 이 루우 쇼오가 유명하다. 고려 고종 때 귀화한 그는 안남 국(베트남)의 왕족이었다. 당시 안남 국도도 한자를 사용하고 중국식 한자 성씨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이 성씨는 고려에 귀화한 뒤에 딴 것이 아니라, 원래 그 국왕실의 성이었던 것이다. 동남 아시아 출신 귀화인 중에는 제27대 충숙 왕 때 남만인 귀화인의 왕 세 주석도 있었다. 남만 사람들은 동남 아시아 사람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왕 세 주석은 충숙 왕이 바탕이 있을 때, 의술의 재능이 있다고 해서 친해졌다. 그는 아첨과 속임수로 임금의 사랑을 받고 측근의 신하가 됐다. 『 고려사 』는 그의 성질이 까불고 간특기 그지없다고 기록했다. 그래도 왕의 총애를 받고 왕실의 성을 하사 받고 정도 문학이라는 고위 관직에 올랐다. 조선 시대에도 다양한 국적의 귀화인이 있었다. 초기에 장·사도(장 생각 도)외에 20여명도 귀화한 적이 있었다. 창사 섬은 외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예 손님 경)의 관직에 오르기도 했다. 이 관직은 종삼품의 고위직이었다. 세종 때에 귀화한 우신다는 남만인이 조선 여성을 얻어 살았다는 기록도 있다. 그 밖에도 『 조선 왕조 실록 』을 보면 태국인 자바인, 타타르인 등이 귀화한 기록이 나온다. 『 세종 실록 』에는 특히회인에 대한 기록이 잘 보인다. 멀리 중동 지역에서 한반도까지 육로나 해로에서 많이 찾은 것이다. 지금 일본 영토가 된 오키나와에서 온 귀화인의 오보 학배기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배를 만드는 기술자였다. 그는 조선의 여성에 결혼하려 했으나 조정에서 불허했다. 그 이유는 결혼 후 그가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는 의심까지 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외국인이 혼자 와서 정착하는 경우에는 결혼하는 것을 허용했다. 오보 수채는 조선에 거주한다는 조건으로 결국 조선 여성과 결혼했다. 귀화 일본인 들우록 김씨 시조인 김충선의 초상과 유물.조선은 혼자 온 귀화인 남성이 조선 여성과 결혼하면 세금과 부역을 면제했다. 글이 잘 알면 벼슬도 줬다. 이런 배려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정을 꾸린 뒤 본래 자신의 나라로 도망 치는 사람이 있었다. 『 세종 실록 』에 따르면 신하들이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린 기록이 있다. <이 도도 을 번영이 귀화하고 관직이 4개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왕의 은혜는 생각지 않고 본래의 나라로 도망 쳤다. 이런 불충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흉악한 놈이라 그의 처자를 모두 천인으로 뒤의 사람들에게 경계심을 갖게 하세요.〉 또 이런 기사도 있었다. <귀화 일본인인 근처 왼쪽과 그 아들 근처 효충, 변산 타카오를 의금부에게 명령했던 국문을 했다.>. 변기 등이 자신들의 직위가 낮아 록봉이 희박하다는 이유로 본토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주로 지리적으로 가까운 일본인들이 본래 살던 곳으로 회귀하고 문제를 일으켰다. 귀화인인데 조선인과 같은 성씨를 가지기 위해서 조선 조정에 요청한 왜인도 있었다. 일본 규슈 지방에 살던 요시히로는 일본인이었다. 〈 나는 백제의 후손이지만, 조선인과 같은 성을 가지고 싶습니다. 〉. 부탁합니다만, 부디 성을 받기 바라겠습니다.〉 조선으로 귀화 일본인이 취한 성은 이 씨 성이 많았다. 임진왜란 때 사고 꽃 등 15명에 이 성씨를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선조 28년 때 있었던 일이다. 그들은 화약 제조, 포를 쏘는 솜씨 있는 일본인으로 귀화하고 조선인이 됐다. 중종 때는 귀화한 왜인의 박 산동 헤이스케가 있었다. 그는 거제도에 사는 거제에 왜인이 침입했을 때는 앞장 서서 그들을 격퇴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귀화한 일본인의 후손으로 알려진 성씨는 보이지 않는다. 왜인으로 귀화했으며 본관과 함께 알려진 성씨는 김충선이 시조인 김해 김 씨(일명 우럭 김 씨)뿐이다. 본명이 사야가인 그는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의 선봉에 참전했으나 조선의 문물을 쫓아 휘하 병사들과 함께 망명했다. 임진왜란은 물론 리괄의 난, 병자호란 등에서 주효했다. 이를 기리고 선조는 김해를 본관으로 하는 김 모 성씨를 하사했지만 원래 있던 김해 김 씨와 구별해서”사성 김해 김 씨”라고 한다. 최근 귀화인들은···고려와 조선에서는 귀화인들이 한국의 관습과 제도에 따르고 본으로 성을 만들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른다”라는 원칙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그렇지 않다. 한글로 표기할 뿐 본래의 자기 성을 그대로 갖는 경우가 많다. 귀화인이 귀화국의 성 문화에 동화되다 말고 본연의 성을 유지한다면 후대에 자신의 조상이 누군지, 어디서 왔는지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한국 사회에 동화하지 못했다는 이질감을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다.<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역사적으로 보면. 성은 황제가 내리는 것이다 그는 씨족 사회에서 굳어질 것으로 중국의 봉건제 사회의 기본은 분봉 건국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토지와 관직을 나누어 봉한 나라를 세웠다. 봉쇄하는 것은 작위를 주게(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땅을 주는 것, 그리고 사성, 즉 성을 주었다. 원래 공주는 주의 황제만이 가진 성이지만, 그들이 분봉할 때 다른 성을 줬지만 그 후 각국의 황제들은 공신들에게 자신과 같은 성을 주거나 혹은 다른 성을 만들어 줬다. 하사하는 것, 즉 성은 이렇게 황권의 권한으로 주었다. 그는 황권과 왕권에서 받는 것이 아니라 황권과 왕권에서 성을 받고 오랜 세월 살면서 후손들이 많아지면 다른 곳으로 이주해 정착하면 처음엔 성을 써도 일가를 이루면 그것이 그이지만, 씨족이란 뜻이 강한 것이다.